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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이라는 말을
무슨 섹스할 적에 사용하는 그런 용어로만 의미를 좁히지 말자 ..!
우리가 느끼는 최고의 감각적 경험, 인본주의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가 말하는 절정경험도 일종의 오르가즘에 해당한다.
우리가 어떤 순간에 너무나 감동을 받는다면 그 감동을 받는 그 순간을 오르가즘이라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이미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오르가즘에 대해 광적으로 해석한 빌헬름 라이히 라는 인물이 있었다.
오르가즘은 99로 만족하지 못한다. 오르가즘은 100을 원한다.
글을 씀에도 글을 읽음에도 오르가즘이 있다고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느끼고 이를 성취하길 바라지만 그 바라는 만큼의 욕망을 죄다 누리고 사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러기에 프로이트가 말하는 승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승화도 결코 쉬운 주제는 아니다..자아가 건강해져야만 승화도 가능한 것이다.
나는 사람이 득도한 신선이 아니라면 도인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욕구를 절제하거나 승화시켜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자신은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만 결코 남에게 티 내지 않는 인격, 어찌보면 우리 사회는 그런 사람을 더 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 오르가즘도 조금은 무디어진다. 오르가즘의 불꽃은 여전히 남아있으되 그 열정, 그 불길, 그 농염함은 물탄 듯 옅어지고 엷어지고 약해진다.
그래서 남자도 나이가 들면 일반적 의미에서 어느 정도 성욕이 조절된다고 한다. 즉 충동이 느껴진다고 금방 발기가 되지도 않고 그런 생리적 욕구마저 마음으로 조절할만큼 몸이 마음을 따라가 준다고 한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리고 더 나이를 먹고 더 욕망의 근원을 알아갈수록 그 욕망이란 것이 결국은 빈주머니..구멍 뚫린 빈 주머니라는 걸 자각한다.
그래서 젊었을 적에는 "전부"를 바랬지만 나이가 들고 의식이 깊어지면서 "전무"를 그 허무를 그 비어있음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즐겨하는 차원에 이르게 된다.
성욕이 욕망이 아닌 그야말로 상징 그 자체가 되는 것이며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러면서 남자이면서 여자이면서도 둘 다요 둘 다가 아닌 중성이 되어간다.
나는 칼 융이 말한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론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점차 여자화 되어가고 여자는 점차 남자화 되어간다.
그렇게 우리 몸 속의 호르몬은 나 아닌 타자의 성에 대해 눈 뜨게 만들어주며 그로 인해 전에 한번도 느껴보지 않았던 감정들을 슬금슬금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점차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을 배워 나간다. 그러면서 오르가즘이 아닌 즐거움과 기쁨의 의미를 배워나간다. 그걸 어느 정도 다 배우고 나면 죽음이 찾아온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죽음은 가장 큰 오르가즘이요(삶이 마지막으로 꽃피다 끝나는 순간이 죽음이기에..) 가장 큰 허무이며 가장 큰 상징이요 삶이 승화된 마지막 결정체다. 삶은 죽음의 은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닐지 모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두려움은 오르가즘을 무디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자신의 두려움과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애써야 한다. 오르가즘을 느끼려 몸부림 칠 필요가 없다. 그저 두려움만 극복한다면 삶은 그야말로 오르가즘 가득하다.
가끔 드라이버 飛ㆍ거리가 홍두깨처럼 뛰어 나올 때 오르가즘 ㅣ이다.
이 외에도
하루 왼종일 삶 속에서 이걸 생산해 내는 내 안에 공장을 만들어야 겠다.
고령화 시대에 걸맞는 Orgasm game을 만들던지. 해야겠다라든지,
뭐 ...
이런 동호회도
Orgasm 동호회 ..!!!
무슨 섹스할 적에 사용하는 그런 용어로만 의미를 좁히지 말자 ..!
우리가 느끼는 최고의 감각적 경험, 인본주의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가 말하는 절정경험도 일종의 오르가즘에 해당한다.
우리가 어떤 순간에 너무나 감동을 받는다면 그 감동을 받는 그 순간을 오르가즘이라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이미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오르가즘에 대해 광적으로 해석한 빌헬름 라이히 라는 인물이 있었다.
오르가즘은 99로 만족하지 못한다. 오르가즘은 100을 원한다.
글을 씀에도 글을 읽음에도 오르가즘이 있다고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느끼고 이를 성취하길 바라지만 그 바라는 만큼의 욕망을 죄다 누리고 사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러기에 프로이트가 말하는 승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승화도 결코 쉬운 주제는 아니다..자아가 건강해져야만 승화도 가능한 것이다.
나는 사람이 득도한 신선이 아니라면 도인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욕구를 절제하거나 승화시켜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자신은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만 결코 남에게 티 내지 않는 인격, 어찌보면 우리 사회는 그런 사람을 더 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 오르가즘도 조금은 무디어진다. 오르가즘의 불꽃은 여전히 남아있으되 그 열정, 그 불길, 그 농염함은 물탄 듯 옅어지고 엷어지고 약해진다.
그래서 남자도 나이가 들면 일반적 의미에서 어느 정도 성욕이 조절된다고 한다. 즉 충동이 느껴진다고 금방 발기가 되지도 않고 그런 생리적 욕구마저 마음으로 조절할만큼 몸이 마음을 따라가 준다고 한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리고 더 나이를 먹고 더 욕망의 근원을 알아갈수록 그 욕망이란 것이 결국은 빈주머니..구멍 뚫린 빈 주머니라는 걸 자각한다.
그래서 젊었을 적에는 "전부"를 바랬지만 나이가 들고 의식이 깊어지면서 "전무"를 그 허무를 그 비어있음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즐겨하는 차원에 이르게 된다.
성욕이 욕망이 아닌 그야말로 상징 그 자체가 되는 것이며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러면서 남자이면서 여자이면서도 둘 다요 둘 다가 아닌 중성이 되어간다.
나는 칼 융이 말한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론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점차 여자화 되어가고 여자는 점차 남자화 되어간다.
그렇게 우리 몸 속의 호르몬은 나 아닌 타자의 성에 대해 눈 뜨게 만들어주며 그로 인해 전에 한번도 느껴보지 않았던 감정들을 슬금슬금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점차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을 배워 나간다. 그러면서 오르가즘이 아닌 즐거움과 기쁨의 의미를 배워나간다. 그걸 어느 정도 다 배우고 나면 죽음이 찾아온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죽음은 가장 큰 오르가즘이요(삶이 마지막으로 꽃피다 끝나는 순간이 죽음이기에..) 가장 큰 허무이며 가장 큰 상징이요 삶이 승화된 마지막 결정체다. 삶은 죽음의 은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닐지 모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두려움은 오르가즘을 무디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자신의 두려움과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애써야 한다. 오르가즘을 느끼려 몸부림 칠 필요가 없다. 그저 두려움만 극복한다면 삶은 그야말로 오르가즘 가득하다.
가끔 드라이버 飛ㆍ거리가 홍두깨처럼 뛰어 나올 때 오르가즘 ㅣ이다.
이 외에도
하루 왼종일 삶 속에서 이걸 생산해 내는 내 안에 공장을 만들어야 겠다.
고령화 시대에 걸맞는 Orgasm game을 만들던지. 해야겠다라든지,
뭐 ...
이런 동호회도
Orgasm 동호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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