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識/관성...필사 14

분리와 분별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을 / 불별하여 / 분리하는 데서 /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 분리라고 느끼는 자체가 마음에 아픔을 일으킵니다. 왜 일까요? 모든 분리는 분리된 것들 사이의 충동을 예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인간의 생로병사 모두가 공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로병사란 정말로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죽는 순간을 경험해 보았나요 ? ​ 자신은 그 어떤 직접적 경험도 없이 그저 그렇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 만일 당신은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믿겠습니까 ?" 당신은 태어났다고 세뇌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인류 전체에게 널리 퍼져있습니다. 화성에는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것은 '믿지 않지만' 자신이 태어났다는 것은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

意 / 心

• 의식과 마음의 계합, 의식보다 마음의 속도가 100배 이상 빠르다. 목적은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마음은 신출귀몰하다. 마음은 태어난 적 없고, 태어난 적이 없으니까 죽지도 않는다. 마땅히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본래 마음은 스스로... 어느 한순간도 집착하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 딱, 마음이 알아서 하도록 모든 것을 마음한테 양보해 가는 것 이 마음(본마음)을 제대로 쓰는 것, 무위법이다.

쌓이고 쌓여서 옛것이 가려져...

사실 쌓이는 것은 경험의 흔적이지 '경험'자체가 아닙니다. 즉 밥을 먹고 배부른 경험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경험의 흔적이 쌓여서는 하나의 감지(感知 ~ 내면의 흔적)로 남습니다. 이 감지가 다음번 밥 먹을 때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감지가 지금 먹는 밥의 경험과 대비되며 나의 주체인 '난'의 '내용'으로 작용합니다. ​ 왜냐하면 내면의 쌓여있는 기존의 것에 주의가 많이 머물고, 쌓인 그것에서 지금 들어온 정보에로 주의가 흐르며 비교가 일어나는데, ​ 이때 주의가 시작되는 곳이 주체인 '나'로 느껴지고 흘러가 도작하는 곳이 객체인 '내가 있다'는 느낌이 강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이렇게 하나의 경험의 흔적이 쌓여 강화되면 그것을 집(集)이라고 하고, 이것은 점차 자동화를 불러 일으킵니다..

속 앓이

*** 내면의 분열을 넘어선 곳에 신비​ 우리가 무언가를 "의식"을 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 내면이 '분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그것은 이미 말하는 '누군가'와 듣는 '나'로 내면이 분열되어 구분되기 때문에 그런 인식이 가능한 것처럼... ​무언가를 '의식'한다는 것의 내면이, 의식되는 '대상'과 의식하는 '나'로 나누어지고, '나'에 에너지가 더 많이 쏟아져 '주체'로 삼고 있기에 그러한 인식현상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은 분열을 기반으로 일어납니다. 감정은 미묘한 "느낌"이 분열된 생각에 의해 증폭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 수십년 이상을 살아온 우리의 내면에는 세상과 ㅣ 거의 흡사한 세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 차이 나는 점이 있다면 온통 하나인 우주적 불..

내 편과 내 적

의식의 근본에서 차이의 발견 ​매우 지성적이어서 즉각적으로 핵심을 돌진해 들어가 알아챘지만 몸과 마음에 쌓여있는 관성적 패턴을 다루는 데 ​시간이 따로 필요했다. ​ 반면 다른 이는 감정적 문제에 대해 더 맣이 힘들어 하며 지나갔는데 이 힘든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관성적 패턴도 함께 다루는 것이었다. ​ 삶의 에너지를 통해 가는 사람 감정을 기반으로 넘어가는 사람 ​지성적으로 즉시 꿰뚫지만 관성을 다루어야 하는 사람

... ....이어서 2

생략 >>> 우리의 모든 의식작용에서, 以前의 움직임이 흔적을 남겨 일종의 내적인 기준이 되고, 이후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 약하면 痕跡(흔적)이라 하고, 조금 강하면 패턴(Pattern)으로 작용하며, 아주 강하면 틀(型)로 작용합니다. ​ 그것이 '자아'라 이름 붙여진 것의 실체입니다. 이 자아가 확대된 것이 집합적인 '믿는 생각'으로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이 '집단의식'이라 할 수 있는 사회는 인간의 '믿는 생각'들로 이루어집니다. ​ 즉 그 믿는 생각이 무엇이냐에 따라 양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 생각에는 개인과 사회에 고착된 것이 있습니다. ​ 생략>>> ~~~ 믿는 생각은 고착된 것 같지만 어떤 통찰이나 거대한 압력, 흐름에 의해 순간적으로도 바뀔 ..

....이어서

불교에서는 無名의 바람이 만들어낸 고(苦)의 세계라고 합니다. 불교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 무명의 바람, 즉 무의식적 쌓임(集)이고, 그 소멸의 이르는 길이 道입니다. 이렇게 하여 불교의 四聖諦인 고집멸도가 설해진 것입니다.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 감지들과 동일시되는 순간을 알아챌 수 있으며, 그러면 감지에 저절로 쏟아부어지는 생명 에너지가 차단됨으로 해서 동일시가 끊어지고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detail ...>>> 먼저 ​ '감지들과의 동일시' '그것을 알아챔' '저절로 쏟아부어지는 생명에너지' '에너지 차단에 의한 동일 시 끊기' 등의 문구들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해보겠습니다. ​ 특히 感知와 情이 바로 集에 해당합니다. 경험의 1 차적 흔적인 감지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일어나는 미묘한 ..

관성의 세계

'나와 대상'이 동시에 발생할 때 그 중 '나'라는 느낌을 일으키는 구성 성분의 하나가 '주체감'입니다. 또 하나의 성분인 '내용'이 청사진이라면, '주체감'은 어떤 '주인'의 느낌을 만들어 냅니다. ​ 이것은 注意가 많이 모이고 쌓여 흘러갈 '주의의 원천(source)' 역할을 하는데, 그래서 '주체'는 내외적으로 주의의 시작점이 되고, '대상'은 주의의 도착점이 됩니다. ​ 예를 들어 저 밖에 있는 나무를 보면 이 몸에 있는 '내'가 대상인 저 '나무'를 본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때 주의는 이 몸 쪽에서 저 나무 쪽으로 흐릅니다. ​ 즉 이 몸이 주의의 시작점, 나무가 주의의 도착점이 되어 '나와 대상'을 이루게 됩니다. ​ 또 내면을 살펴봐도 '누군가'가 있는 쪽으로 '주의'가 흐릅니다. ​ 아 두..

지성적 통찰

지성적 통찰을 통해 머리의 의문은 완전히 사하지지만 이 정서적인 허무감이나 불쾌감은 오래도록 가지기 않습니다. ​ 왜일까요 ? 왜 이 느낌은 눈을 뜨면서부터 생겨나 있는 것일까요 ? ​ 그것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나는 그것이 무의식에 쌓인 어떤 情의 작용임을 알아챘습니다. 잠은 무의식으로 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무의식에서 빠져 나오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기분이 늘 느껴진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무의식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무의식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어떤 쌓여있는 정이 작용을 하는 곳입니다. 마치 바다의 밑바닥이 은근한 출렁임으로 늘 흔들리고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 표면의 끊임없는 파도가 일시적인 현상일 뿐 나의 본성이 아님을 알아채자 그 파도는 잠잠해졌지만,..

텅빈 충만

텅빈 충만이 있을 뿐 . 이것은 오래 쌓이면 '밀침'과 '끌림'의 토대다. 따라서 情(뜻 정)의 기본 요소가 됩니다. ​ 여기에는 외적인 감지와 내적인 감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외적인 감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외부적이라 '느껴지는'것도 역시 내적인 '느낌'인 감지로 귀결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내적인 '느낌의 세계 일 뿐'이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거기에는 '세계는 마야(환영)다'라는 선언이 가슴에 와닿게 됩니다. ​ 기본적으로 '세계가 환영이다'라는 것은 사실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감각적 자극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고 어떤 사물을 만져본다고 해봅시다. 그 촉감으로 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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