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에너지ᆢ 存在ㅣ
우리가 자신을 느끼고 관찰하기 시작하면 에너지를 얼마나 낭비하고 있는지 알게 되며, 특히 자기 이미지를 심거나 보호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머무르면 그러한 분투와 긴장에 낭비되던 에너지가 현재에 머무르도록 자양분을 줄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대개 에너지의 변형에 관한 전통적 개념들, 특히 차크라나 경락, 채널, 에너지 센터 등과 같은 개념들에 대해서 친숙
하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에너지의 미세한 형태들을 의식적으로 알아
차리는 경험은 거의 하지 못한다.
보통 에너지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나 완전히 소진되었을 때 또 명상하거나 격렬한 육체노동을 할 때만, 우리는 어느 상태에 있는 에너지를 인식한다.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 외의 시간에는 우리가 에너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그 질이 어떠한지 또 에너지가 우리의 몸을 어떻게 통과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 결과 에나지의 대부분은 매순간 우리를 매혹시키거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우리의 관심을 장악하는 것에 기계적으로 소모되어 버린다.
보통 우리는 감각에 깨어있을 때 에너지를 인식할 수 있다.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내면으로 향한 관심을 몸에 둠으로써, 즉 피부와 근
육과 내부 장기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우리에게 에너지가 얼마만큼
있는지 그 질이 어떠한지 직접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애써 몸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우리가 전
혀 감지할 수 없는 부분인 거대한 구멍을 목격할 것이다.
또 ‘감각’이라는 단어가 관심의 정도와 유연성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몸에 주의를 기울이는 작업을 진지하게 계속하다 보면, 결국 우리는 감각의 서로 다른 서너 개 층을 구별하게 된다.
근육이 긴장되고 수축되는 단편적인 감각에서부터 ‘꺼끌꺼끌한’ 피부의 일
반적인 감각, 체온과 움직임의 감각, 내장 기관들과 체액들과 뼈들이
살아서 숨 쉬는 감각, 우리를 관통하여 흐르는 생명력이라는 깊고 넓은 의미의 감각까지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에 대한 자각은 몸 전체를 감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몸의 다양한 형태와 움직임과 긴장과 수축 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어떤 감각이 에너지를 생성하고 반면에 어떤
감각이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근육을
불필요하게 수축하면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반면에 몸을 활발히 움
직인 다음 이완하면 에너지가 생성된다.
이상적으로 보면, 몸의 전반적인 감각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위한 배경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이해도 필요하다.
.
그것은 몸이 경계가 분명한 딱딱한 고체일 뿐만 아니
라 일종의 광범위한 울림을 통해 우리의 내부와 외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비롯하여 전체 우주와 우리를 연결지을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의 장임을 깨닫는 것에 달려 있다.
물질주의에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람들 조차도 몸과 몸을 감싸고 있는 배경 사이의 분리가 분명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에너지는 다양한 물리적, 화학적, 심리적 과정들을 통해 변화하고 변형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외부에서 섭취하는 음식과 공기와 인상들과 관련이 있
고, 숨쉬기와 인식하기와 움직이기와 말하기와 배설하기 등과 같이
조건에 대응하는 다양한 행위들과 관련이 있다.
미세한 에너지들 게다가 우리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식별할 수 있는 물리적 에너지들 뿐만 아니라 미세한 에너지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우리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경험적 증거는 무수히 많다.
그 미세한 에너지들은 피부라는 경계에 제한되지 않고, 전통적 문화권들에서 ‘에너지체’ 혹은 ‘정기(精
氣’)라고 불리는 형태로 우리를 관통하거나 둘러싸면서 방출된다. .
그리하여 몸과 몸을 둘러싼 환경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소외시킬 수 없도록 친밀한 춤을 추면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다.
우리에게 물질성과 물질이라는 감각을 느끼게 하는 에너지의 춤이, 에너지의 변형이 끊
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춤의 일환으로 일어나는 에너지의 변형은 대부분 우리의 영향권 밖에 있지만 일부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법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 즉 기독교에서 metanoia라 부르는 태도의 혁명적 전환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향력은 우리의 에고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식 그 자체에서 나온다.
우리가 우리의 에고나 자기상, 즉 스스로에 대한 환상이나 잘못된 관념을 진실로 직면할 때, 그것을 고수하기 위해 쓰였던 에너지들은 진정한 변형을 위해 쓰이도록 자유롭게 될 것이다.
보고 듣고 웃고 감지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아우르는 이 변형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을 하거나 생각하거나 감지하거나 느끼거나 그것을 하는 과정
에서 전체성과 통합이라는 넓디넓은 의미를 느끼게 된다.
작업을 시작하기 에너지를 알아차리는 작업의 초기에 우리가 할 일은 에너지가 어떤식으로 몸에 나타나는지 예민하게 알아채는 것으로 충분하다.
일상의 한가한 순간들뿐만 아니라 여러 일로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감지하는
법을 알면, 에너지가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지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기 스스로에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이미지를 심거나 보호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아 붓고, 또 상황을 예단
하고 기대하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일에 수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도 조바심치며 에너지를 소비한다. 날씨나 다른 사람들의 운전습관
등이 그러한 예다.
더욱이 바르지 않는 자세와 잘못된 몸에 대한 교육 때문에, 그리고 닫힌 사고와 딱딱히 굳은 감정들과 감각들과 동일시되어 그것들의 노예로 산 결과로, 우리는 불필요하게 긴장하거나 비효율적으로 행동하는 데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가 이렇게 낭비되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몸에 배인 여러 습관들과 분노나 불안이라는 감정들과 환경의 변화 등을 적극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특히 얼굴과 눈과 목과 손과 어깨와 복부와 골반을 주목해야 한다.
입에 긴장이 있거나 어
깨가 위로 추켜세워지거나 배에 힘이 들어가면 그곳에서 에너지 소비
가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화가 나거나 불안하거나 짜증나거나 신경질이 났을 때 자주 그러하다. 그래서 정작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더 이상 에너지가 없다고, 침대에서 일어날 힘도 없다고 투덜거리는 일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몸은 안과 밖으로부터 받는 물리적, 심리적 압박에 반응하면서 끊임없는 긴장(대개는 불필요한 긴장) 속에 있으며, 그 긴장 때문에 우리의 에너지가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각을 감지하는 작업을 하면 할수록, 긴장이 생길
때 그것을 더욱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에너지
가 긴장으로 소모되기 전에 자기 감지를 통해 긴장이 발생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설사 긴장을 멈추지는 못할지라도, 깨어있으면 즉 우리가 현존이라고 부르곤 하는 그 상태에 있으면 긴장을 설명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지어내는 스토리와는 물론 그 긴장과의 동일시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는 긴장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지금 긴장이 생기고 있다’고 말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누구누구가 이러저러한 일을 해서 또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해서 긴장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긴장 때문에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그저 알아차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동일시와 깨어있음 사이에서의 분투>
지금 현재에 머무르면, 즉 긴장을 비롯해 그것의 원인들과의 동일시와 이것들에 대한 깨어있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투를 관찰하면서 현재에 머무르면, 긴장에 낭비되던 에너지들은 현재에 머무르는 일에 자양분을 주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동일시가 아니라 깨어있음을 선택하면,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인상에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거나 집착하지 못하게 하는 일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고 영혼에게 자양분을 주는 일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될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는 더욱 가벼워지고 민감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안팎의 세계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넓은 인식의 장처럼 더욱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으로 유기체 구석구석에서 그 에너지를 감지하기 시작할 것이다. 더욱 포괄적인 이 감각에 깨어있으면,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의식의 에너
지 그 자체에 가슴을 활짝 열고 있게 될 것이다.
자기변형과 깨어있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에너지이기 때문이다.(끝)
• 이 글은 『The Energy of Awakening』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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