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 * 일 *

나의 혀는 몇개인가 ?

수승화강지촌 2021. 7. 3.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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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혀가 있다.

나에게는 혀가 여러 개 있다.
거울 앞에 서서 혀를 내밀어 볼 테니 잘 보시라.
지금 보이는 혀는 나의 두 번째 혀이다. 낮은 목소리 톤으로 표준어를 구사하는 교양 있는 혀.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이 혀와 함께한다.
국가가 공교육을 통해 만들어 주고 내가 먹고살기 위해 기꺼이 선택한 혀. 나의 교양 있는 혀를 우아하게 접어 본다.
그 아래에는 또 다른 혀가 있다. 일명 영어 혀. 발음에 집착하지만 이 혀는 경직되어 있고, 매우 얄팍하며, 무엇보다도 세월이 갈수록 점점 짧아지고 있다. 쓸모가 많다 하여 많은 돈을 들여 이 혀를 키워봤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 혀 옆에는 새싹 크기의 독일어 혀가 있다. 이 혀가 할 수 있는 독일어는 이것뿐이다. 이히 하베 아이네 프라게(Ich habe eine frage). 질문 하나 있습니다. 이 혀는 질문 있다고 말해 놓고서는 정작 질문은 못 하는 그런 혀이다.
그 독일어 혀 옆에 그만큼 작은 일본어 혀가 있다. 이 혀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와카리마셍(わかりません)’밖에는 없다. 독일어 혀가 말한다. 질문이 있어요. 일본어 혀가 대답한다. 저는 몰라요. 그리고 이 혀들 옆에 엉기성기 풀줄기 몇 개를 모아놓은 모양의 중국어 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셤머(什么)? 뭐라고?

**이런 자잘한 혀들을 걷어내 보자.


그 아래에는 앙상하게 말라가는 나의 첫 번째 혀가 있다. 제주도 말을 하는 이 혀는 평소에 꽁꽁 숨겨져 있다가, 부모님과 통화할 때나 감정이 격앙되어 흥분했을 때 잠깐 고개를 내민다.

나에게 두 개의 혀, 아니 여러 개의 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저기 다른 혀를 사용하는 자가 있다!



마지막 질문.

각기 다른 질문이지만, 사회언어학에서는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힘’에서 찾는다. 사회적으로 힘이 약한 집단 또는 개인은 힘이 센 언어의 위세를 빌려와 자신의 약함을 벌충한다. 제주도 사람들이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제주말을 버리고 서울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제주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매우 힘이 약한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힘이 약한 집단에 속해 있으니, 지체할 것 없이 힘이 센 언어, 표준어의 위세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대중 매체에서 경상도 방언 화자가 더 많이 노출되고, 전라도 방언 화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표준어가 가진 위세보다는 덜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경상도 방언과 그 화자 집단이 가진 위세는 다른 방언과 그 사용자들에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압도적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혀를 버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힘이 없다면, 자신의 본래 목소리를 숨기고 다른 혀를 찾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표준어를 더 잘 구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고?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힘이 세졌다면 표준어의 위세를 빌려 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성들이 첫 번째 혀를 버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이 첫 번째 혀로 만들어내는 목소리를 사회가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성들이 비표준형을 사용하는 이유는? 남성들 사이에서 같은 남자로서의 유대감은 최고의 가치이며, 비표준형의 사용은 이를 증명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만약, 여성이 비표준형을 사용한다면?

그렇다면 그 여성은 되바라졌다거나 조신하지 못하다는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즉 비표준형을 사용하는 여성은 통제할 수 없는 야생의 존재, 계몽되지 않은 존재로 취급당한다.

아니라고?
영화 속 욕쟁이 할머니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는지 생각해 보라. 반면 표준어를 사용하는 여성은 계몽된 존재, 정숙한 여인으로 인식될 것이다.

자기 본래의 목소리를 낼 수 없어 표준어를 사용했는데, 그 순간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아이러니. 이렇게 보면 여성들은 이중의 덫에 포획되어 있는 셈이다. 자고로 여성들은 말하되 말하면 안 되는 존재들, 혀가 있지만 혀를 숨겨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어쩌다 목소리가 새어 나와도 여성의 말은 가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여성들의 목소리는 봉쇄당해 왔다.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여성들을 향해, 이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뭐라고 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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