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識

겸손

수승화강지촌 2025. 2. 1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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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날 조건의 평등을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계층ㆍ인종ㆍ민족ㆍ신앙에 관계없이 사람들을ㆍ 한ㆍ 데ㆍ모을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은 얼마 없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수십 년 동안 시장 주도적 세계화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가져오면서 우리는 제각각의 생활방식을 갖게 되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하루 종일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우리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살고 일하며 쇼핑하고 논다.  우리 아이들은 각기 다른 학교에 다닌다.

그리고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가 일을 마치면,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그 성공의 대가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다 자업자득이라고 여긴다.

이는 정치에 매우 유해하며 당파주의가 하도 팽배하여 이제 사람들은 신앙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껄끄럽게 보게 되었다.

우리가  중요한 공적 문제에 대해  서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심지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이런 생각의  세속판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유쾌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 된다"라는 약속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의 비전은 공동의 민주적 프로 젝트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서 눈을 돌리도록 했다.

      ᆢ 하나는 소비주의적인 공동선, 다른 하나는 시민적 공동선이다.

공동선이 단지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면, 조건의 평등은 고려할 게 못된다.

민주주의가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경제일 뿐이라면, 각 개인의 이해관계와 선호의 총합  차원의 문제라면, 그 운명은 시민의  도덕적 연대와는 무관할 것이다. 소비주의적 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가 활기찬 공동의 삶을 영위하든, 우리와 같은 사람끼리만 모여 각자우 소굴에서 사적인 삶을 살든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 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


ᆢ자수성가적 존재
ᆢ자기 충족적 존재



**_  겸손함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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