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의 가르침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 앞에서 마음은 온통 원망, 자책, 분노, 부끄러움으로 가득찼다.
……;) 가만히 들숨과 날숨을 지켜 보라고 했다.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누구나 불안과 괴로움을 겪고 거기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불안에 잠식될 때 우리는 매우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절대적인 힘에 의존하고 싶어진다.
“네 마음을 가져와라. 내가 너를 편안하게 해 주겠다.”
달마의 대답이었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마음을 가져오라니?
제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토록 생생했던 불안의 감정도, 불안이 터 잡고 있다고 믿었던 마음의 존재도 생각만큼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상을 배우는 이유중에
들숨 날숨을 관찰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신 차려 보면 마음은 엉뚱한 곳을 헤매곤 했다.
※ 집중[止]도 관찰[觀]도 쉽지 않았다.
나의 자책과 불안과 두려움도 바람이 불면 일어나고 바람이 멈추면 사라지는 파도처럼 조건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고정된 ‘나’도 없고, ‘나의 불안’도 없었다.
"내면의 마음"과 "외부의 세계" 모두 무상한 변화 속에 있고, 고정된 실체라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지식이 아니라 체감의 영역으로 데려왔다.
※ 직관적으로 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제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는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네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다. 제법무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아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바로 여기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내가 있는데, 어떻게 무아라고 할 수 있느냐, 무아야말로 궤변이 아닌가 의심한다.
아트만은 무엇인가 ?
마치 소금물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생명의 핵심이다. 감각기관이나 의식으로 포착할 수는 없지만 실재하는, 우리 존재의 에센스인 영혼이자 진짜 자아인 바로 그것이었다.
아트만이야말로 변화하는 몸과 마음 너머에 있으면서 변화하는 몸과 마음을 주재하는 우리 자신, 영원하고, 변하지 않고, 나의 자기 동일성을 보증하는 무엇의 이름이었다.
실체는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다.
실체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능동적이다.
오온(五蘊)은
물질의 집합[色蘊]
느낌의 집합[受蘊]
표상의 집합[想蘊]
의지의 집합[行蘊]
의식의 집합[識蘊]을 말한다.
자아인 몸은 병들지 않아야 한다.
물질만 그런 것이 아니다. 느낌이 아트만이라면 불만족한 느낌은 있을 수 없다.
표상이 아트만이라면 잘못된 개념은 있을 수 없고,
의지가 아트만이라면 자신을 해치는 행위를
물질이 자아라면 물질은 자신 이외의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자아인 몸은 병들지 않아야 한다. 물질만 그런 것이 아니다.
느낌이 아트만이라면 불만족한 느낌은 있을 수 없다.
표상이 아트만이라면 잘못된 개념은 있을 수 없고, 의지가 아트만이라면 자신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의식이 아트만이라면 의식불가능한 영역이란 있을 수 없다.
오온 각각을 ‘나’라고 할 수 없다면, 오온을 합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자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구상물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몸도 정신도 무상하게 변한다. 몸이 무상하기 때문에 몸은 변화로 인한 괴로움을 겪는다. 정신도 무상하다. 그래서 정신 역시 변화로 인한 괴로움을 겪는다.
특별한 능력자가 아닌 이상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무아의 지혜를 통찰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오늘 먹은 음식과 대지와 중력이 나를 걷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