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면의 분열을 넘어선 곳에 신비
우리가 무언가를 "의식"을 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 내면이 '분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그것은 이미 말하는 '누군가'와 듣는 '나'로 내면이 분열되어
구분되기 때문에 그런 인식이 가능한 것처럼...
무언가를 '의식'한다는 것의 내면이,
의식되는 '대상'과 의식하는 '나'로 나누어지고,
'나'에 에너지가 더 많이 쏟아져
'주체'로 삼고 있기에 그러한 인식현상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은 분열을 기반으로 일어납니다.
감정은 미묘한 "느낌"이
분열된 생각에 의해 증폭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십년 이상을 살아온
우리의 내면에는 세상과 ㅣ 거의 흡사한
세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차이 나는 점이 있다면
온통 하나인 우주적 불이(不二)의
세상에는 이름이 붙거나 나눠져 있지 않지만
우리의 내면세계는 선으로 그어져 있고
나눠지고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것을 통해 "안다"거나 "느낀다"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적 세계"의 분리를 통해
우리는 "분리없는"세상을 나누어 놓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이(不二)의 세상과 달리 나뉘어진 세계는
끌리고 밀치는 의식적 움직임이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거기서 모든 희노애락이 분화되고 증폭되어
우리를 폭풍같이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분리로 인한 그 내적 "세계"의 밀침과 끌림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이제 드디어 분리없는 진정한 세상, 거대한 자연의 신비를
체험할 때가 옵니다.
"신비"는 의식적 "안다"를 떠난 '모름‘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근본에 대한
최종의 통찰이 언뜻 일어나면
많은 것에서 자유로워짐을 느끼지만
동시에 모두가 무상하여 허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 허무함의 "느낌" 아래에는
사실 '아무' 의미없어, '아무 소용 없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기 쉽습니다.
그것이 오래되면 극도의 허무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에 우리가 빠지는 함정입니다.
이 허무감이란
끊임없는 '나'와 '대상' 이라는 순환의 회오리에서
빠져나왔기에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데서 오는
"멈춤"입니다.
(중략)
그때 그는 '자신'이 '갈 데'가 없다고 '느낌'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허무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것이 하나의 느낌으로써 임시적인 '현상'임을
본 이후에는 왜 이 허무감은 올라오는걸까?
그 ~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라는 우주의 명령을 거부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느낌'으로, 관성의 영향이 크게 작용합니다.
모든 내면의 현상이 '내가 아님'을 발견해도 어떤 느낌들은 지속적으로
올라옵니다. 그 느낌들이 하나의 현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느낌이 올라온다는 것, 그 느낌이 있다는 것은 여전합니다.
괴로움도, 슬픔도, 특히 허무함이 많이 올라오는데 그것은 왜일까 ?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러한 감정의 배경에는 어떤 관성적인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그 믿음, 무언가를 믿고 있는 그 믿음,
즉 에너지가 가해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현상'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함정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라는 에너지 현상을 잘 살펴보는데서 지혜가 대신 자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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