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識/관성...필사

... ....이어서 2

수승화강지촌 2022. 9. 16.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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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의식작용에서,

以前의 움직임이 흔적을 남겨 일종의 내적인 기준이 되고,

이후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 약하면 痕跡(흔적)이라 하고,

조금 강하면 패턴(Pattern)으로 작용하며,

아주 강하면 틀()로 작용합니다.

 

 

그것이 '자아'라 이름 붙여진 것의 실체입니다.

 

이 자아가 확대된 것이 집합적인 '믿는 생각'으로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집단의식'이라 할 수 있는 사회는 인간의 '믿는 생각'들로 이루어집니다.

 

 

즉 그 믿는 생각이 무엇이냐에 따라 양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 생각에는 개인과 사회에 고착된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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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는 생각은 고착된 것 같지만 어떤 통찰이나 거대한 압력, 흐름에

 

의해 순간적으로도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신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는 생각의 양상을 잘 살펴 보십시오.

 

특히 거기에 붙어있는 '믿음'이라는 에너지를 상세히 느껴보십시오

 

그것이 감정을 넘어 그것을 아름답게

 

사용하기 위한 제 1단계 필수 과정입니다.

 

믿는 생각에서 한발 더 깊이 들어가면,

 

 

감정의 가장 기저에는 '나와 대상의 분열'

 

그러므로 잠이나, 몰입, 삼매 등의 과정 즉 "분별없음"에서

 

아침에 깨어난 상태나 여러 대상을 의식하는 상태인 "분열 있음"

 

으로 나오는 순간을 알아 채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대상으로서의 ''과 주체인 ''

 

확연하게 존재하는 이 세계가, '마음의 일'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분열없음'에서 최초의 '분열있음'으로 나오려고 할 때는

 

분열의 강도가 약하기에 그것이 '마음의 일이다'라고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파악된 것을 확연하게 분열된 '세계와 나'에도 적용해,

 

이것 역시 '마음의 일'임임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마음의 내적인 분열임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통찰이 감정을 넘어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가장 적절히 사용하며 살 토대가 되어줍니다.

감정은

 

역동적인 에너지의 발현이다.

 

 

생명유지를 위한 공포감이나 음식에 대한 쾌감처럼 본능적 충동이

 

아니라면 감정은 대부분 생각과 믿음이 만들어 냅니다.

 

 

그것들이 현재 일어난 상활과 부딪혀 일어나는 것. ... !!

 

 

感情 = 생각() X 믿음() X 상황

 

Contingency Theory - 狀況理論

 

 

여기서 생각은

 

일종의 방향타 역할을 하고, '믿음'은 에너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에너지는 자동적 주의 집중을 일으켜 그 생각에 빠지게

 

하며, 일종의 信憑性인 무게감을 줍니다.

 

 

먼저 당신이 전혀 관심없는 일에 대해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 느껴보고, 다음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거나 굳건히 믿고 있는 문장을 떠올려 느껴보십시오.

 

이 두 문장의 느낌에는 분명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무게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에너지' 무게를 '느낄 줄' 알게 되면

 

그로부터 쉽게 벗어 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붙어있던 생각은 마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글을 배끼면서 떠오른...

 

1. '나와 대상'

 

2. '에너지 무게'

 

3. '생각의 믿음'

 

다만 중요한 것은 '믿음' 그 자체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나의 신념에서 생각을 제외한 '믿음 자체'를 느끼는 연습을 해보십시오.

 

그것은 일종의 에너지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을 느끼게 되면 이제 당신은 그것 밖에 있게 됩니다.

 

 

느낀다는 것 자체가 그것으로부터 떠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연필을 쥔 채로 살아왔으며,

 

전 생애동안 한 번도 이 연필을 놓아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분명 어떤 '느낌'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느낌'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느낌이 '없었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번만이라도 연필을 놓아본다면 비로소 늘 있어왔던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나와 대상으로 분열되는 순간 ''라는 느낌에 동일시되어

 

그것을 붙들고 있지만, 의식적이 된 이래로 늘 그래왔기에 ''라는 것을 하나의 느낌으로

 

'느낄 수 없는'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번만 거기서 빠져나와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되고,

 

드디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일부분

 

또는 '현상일 뿐' 임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모를 때'

 

생겨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아이들은 만물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요 중에 '모르는 야자가 아름다워요'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통속적이라

 

여겨질지 모르지만 이 말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가사를 쓴 시인은 직관적으로 '아름다음'으 진정한 의미를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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