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昇火降支村

믿음이 건강을 지켜준다.

수승화강지촌 2021. 1. 1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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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ㆍ믿음
ㆍ지금 현재 지니고 있는 지식들은 몽땅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ᆢ 재검증을 받아야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다.

믿을 신(信)은 '사람(人)'과 '말(言)'을 합쳐 만든 글자이다. 이 문자는 진화한 형태로, 고대에는 '말(言)'과 '마음(心)'의 합자인 현재의 '억(悥)' 자를 사용해 '마음과 말이 모두 진실함'을 의미했다. 그러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점차 인간관계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지자 '믿음'이라는 개념도 분류할 필요가 생겼으며 이에 따라 글자도 세분되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믿을 억(悥)으로부터 수평적인 인간관계에서 서로의 믿음을 의미하는 '믿음(信)'과 수직적인 인간관계에서 일방적인 충성을 의미하는 '충성(忠)'의 두 글자가 분화되었다.

신(信)이라는 문자와 가장 근접한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는 Faith일 것이다. 우리말로 신념 혹은 신앙을 의미하는 Belief와 거의 구분 없이 사용되며, 형용사형인 Faithful은 우리말의 '충성스러운'과 대응이 되고 역시 충성의 의미인 Loyal과 구분 없이 사용된다. Faith는 르네상스 초기에 신뢰를 의미하는 라틴 어 Fidem에서 파생되었는데, 초기에는 지금과 같이 추상적인 의미가 강하지 않아서 현재의 Trust 정도에 해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사르트르는 '실존(Existence)은 본질(Essential)에 우선한다'라는 멋진 명제를 제시했다. 이 명제는 20세기 전반부를 풍미했던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유명한 구절이지만, '실존'과 '본질'의 개념 자체는 유럽 철학에서 일종의 골동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실존과 본질이 동일할 수 없다는 개념은 중세 유럽의 경건한 신학자들을 무척 괴롭혔던 명제로, 상당히 오래된 철학적인 질문이다. 사실 이 논란은 그리 어려운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철학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알 수 있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서 그렇지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말하면 이 문제의 핵심은 단순하다.

"완벽하고 자비로운 신이 창조하고 주관하는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신의 뜻과는 달리 불완전하고 어지럽게 돌아가는가?"

기독교뿐만 아니라 넓게는 이슬람과 유대교까지 포함해 '신이 창조한 조화로운 세계'라는 개념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오만하고 불경스러운 현대 서구의 무신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개념은 그들의 문화가 공유하고 있는 기본적인 세계관이다.

중세 유럽의 신학자들이 말했던 '본질'은 영원불멸의 절대적인 존재가 만들고 다듬은 이상적인 질서를 의미했으며, '실존'은 현실에 나타난 있는 그대로의 불완전한 존재와 현상을 의미했다. 이 주제에 대해 현대 철학의 선구자들로, 인간에게 진한 애정과 연민을 가지고 있었던 니체나 키에르케고르 등이 신학자들과 달리 인간의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 문제는 비로소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게 되었다.

전지전능하신 신이 창조한 최고의 작품이 바로 인간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해도 인간이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은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인식'이라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개인의 '자아'가 개입하면서 본질과는 동떨어진 실존을 창조해 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내면적인 문제에서 실존과 본질이 일치하지 않는 요인이 되는 이 '자아'란 무엇인지 무척 궁금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 책은 실존주의 철학을 주제로 한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악당들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 주제를 전환해야 할 것 같다.

눈 먼 자아가 만드는 눈 먼 사회
흔히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한다. 철학자들의 심각한 저작들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간의 개인적인 '인식' 과정이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가치 평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나름대로 객관적인 기준을 적용하려고 노력하지만 스스로 세워 놓은 자신만의 기준을 적용하게 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상대방과 자신에 의해서 본질이 왜곡된 상태, 즉 '실존'이다. 바로 여기에서 이 장에서 다루는 '믿음(Faith)'이라는 주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생긴다. 우리는 믿음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사실상 아주 취약한 기초 위에 커다란 건물을 세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믿음이 사회적으로 집약되고 보편성을 가지게 되면 개인에 대한 숭배, 정치적 이데올로기, 종교 등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인간들은 본질을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한 사회 혹은 집단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경우도 흔하게 일어난다.

종종 독일 제3제국이 여러 해 전에, 히틀러가 십대 시절 열렬히 원했던 대로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 인을 비롯해 그와 비슷한 수의 비유대 인이 학살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 견해는 별로 타당성이 없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은 경제적인 어려움과는 별개로 유럽에서 가장 개명된 국가 중 하나였다. 최소한 인간의 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18세기의 칸트부터 피히테, 셸링, 헤겔, 희대의 반항아 니체까지 대단한 인물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독일의 관념론은 한 세기 이상 세계의 철학을 주도했다.

또한 괴테와 실러로 대표되는 문학이나 바흐, 베토벤, 바그너로 이어지는 음악 등 독일은 최고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던 국가였을 뿐 아니라 언론, 출판, 교육 등의 발달로 세계 최고 지성의 장이라 할 만했다.

20세기 초반 독일인들은 고도로 지성적인 사람들이었지만 놀랍게도 대다수 국민들이 히틀러가 정계에 진출한 이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줄곧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도 거의 없었다. 몇 차례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그 배후는 대부분 히틀러보다 더욱 극단적인 인물들로, 보다 인본주의적인 체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으로의 복귀를 목표로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한 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 침공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기 전까지는 독일인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운동에 불안감을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의 묵시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미국인들도 상당수 그에게 동조했다.

20세기 최대의 범죄 행위라고 할 수 있는 홀로코스트의 경우도 히틀러와 추종자들이 만들어 낸 광기가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히틀러는 '유대 인의 절멸'을 정치적 구호로 내세웠지만 그가 말했던 '민족 절멸'의 대상은 유대 인만이 아니라 슬라브 인이나 집시와 같은 '지저분한 소수민족들'에게도 같은 의미로 적용되었다.

히틀러의 유대 인 정책은 어디까지나 독일 영토에서의 추방이 목적이었다. 때문에 그는 전쟁이 확산되자 유대 인들을 폴란드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그다음 해인 1940년 여름까지도 그는 유대 인들을 단지 독일과 점령지로부터 추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유대 인의 새로운 정착지는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마다가스카르 섬이었다.

그 시대에 바다는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처칠과 영국인들은 이러한 히틀러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히틀러가 유대 인 문제로부터 말끔하게 벗어나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그 저변에는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뿌리 깊은 반유대 인 정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당시 연합국 사람들은 수백만 유대 인의 운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유대 인 절멸 정책에 대한 가시적인 결과를 지지자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으나, 영국 해군이 희망봉을 돌아 마다가스카르로 향하는 독일 선단을 좌시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이 상황에서 유대 인들은 결국 집단수용소의 가스실이 아니면 갈 곳이 없게 되었다.

'반유대주의'는 당시의 독일인들만이 가지고 있던 감정이 아니라 그 시대 유럽 전체의 시대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히틀러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다. 우리들은 스스로 믿고 있는 신념 혹은 종교에 대해서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관여하는 한 완벽한 것도,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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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후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으며, 대우조선과 대우통신에서 홍보 및 광고 분야에서 일했다. 저술 및 번역, 출판기획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저서로는 '위대한 정복자들에게 배우는 성공의 기술', '활이 바꾼 세계사', '불멸의 여인들' 등이 있다.
출처 불멸의 제왕들 |청아출판사 전체목차
위대한 악인들과 비열한 영웅들, 역사를 움직이고 지배한 권력자들의 전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동서양 3,000 년간의 역사에서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12인 지배자들의 통치 비밀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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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 대축일
부활절로부터 50일째에 오는 일요일에 거행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뒤 부활하여 승천한 다음, 유대교의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한 것을 기념하며, 그리스도교가 세계를 향해 선교를 시작한 날로 여긴다. 유대교 절기로는 원래 첫 수확한 밀을 바치는 감사절이었지만, 랍비들은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히브리인들에게 율법을 내려준 일과 연관지었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언제 처음으로 이 축일을 지켰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2세기 동방교회에서 유래한 〈사도들의 편지〉에 이 축일에 대한 언급이 있다. 북유럽에서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세례를 주는 것이 보편화되었으며, 영국에서는 갓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특별히 흰옷을 입었기 때문에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통 ‘백색 일요일’이라고 하며, 성공회는 이 명칭을 계속 사용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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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
10간과 12지를 조합한 말. 10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이며, 12지는 자(쥐)·축(소)·인(호랑이)·묘(토끼)·진(용)·사(뱀)·오(말)·미(양)·신(원숭이)·유(닭)·술(개)·해(돼지)이다. 결혼이나 이사 등의 날을 잡는 일로부터 운세에 이르기까지 민간신앙의 한 축으로 사용되며, 예전에는 농사짓는 적당한 시기를 선정하는 농사력도 간지에 의존했다. 새해가 밝으면 간지에 근거한 그 해의 이름과 상징을 즐겨 찾아보는 것과 같이 한국 민중들의 일상적 세계관 속에서 끊임없이 전승되어 왔다. 오랫동안 속신의 대상이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도 간지 개념을 활용한 궁합이나 사주 등을 흥미로 살펴보기도 한다.

사주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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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치기 위하여 파악하는 출생한 연·월·일·시를 가리키는 종교용어. | 사람을 하나의 집으로 비유하고 생년·생월·생일·생시를 그 집의 네 기둥이라고 보아 붙여진 명칭이다. 각각 간지 두 글자씩 모두 여덟 자로 나타내므로 팔자라고도 한다. 그리고 사주팔자를 풀어보면 그 사람의 타고난 운명을 알 수 있다 해서 통상 운명이나 숙명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사주는 간지로 나타내는데 ‘간(干)’은 10가지이므로 ‘십간’이라 하고, 사주의 윗 글자에 쓰이므로 천간(天干)이라고도 한다. ‘지(支)’는 12가지이므로 ‘십이지’ 또는 사주의 아랫 글자에 쓰이므로 지지(地支)라고도 한다. 천간은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의 10가지이며, 지지는 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의 12가지이다. 천간과 지지는 모두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분류되고 또 방위와 계절 등을 나타낸다. 지지는 이밖에도 절후(節候)·동물(띠)·달[月]·시각

▲ 관세음보살
고등교과서 윤리와사상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는 인도어로 ‘돌아가서 의지한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돌아가 의지한다.’ 라는 뜻이 된다. ‘아미타불’은 서방 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로서 중생의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자신을 부르는 사람을 구제해 준다. 아미타불은 대승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 가운데 하나이자 정토 신앙의 토대가 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사람들의 고통을 자비로써 모두 거두어 가는 어머니와 같은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에 관한 탱화나 조각을 보면 이마 한가운데에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같이 끝없이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 소원을 성취해 주고자 아미타불을 스승으로 삼고, 그 얼굴을 자신의 머리에 두고 모신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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