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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물格物”
살다보면, 가끔 아니 드물게 격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
내면에서 우러나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카리스마로, 주위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인다.
이 매력은, 흉내와 시기가 남무 하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여 오롯이 정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자신만의 길을 내서, 주위사람들을 그 길로 자연스럽게 인도한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매력을 스스로 찾도록 친절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부탁한다.
그는 자신의 본모습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언제나 편안하고 감동스럽다.
무엇을 억지로 드려내려고 치장治粧하지 않는다. 그런 요란한 치장은 그 대상이 흔하고 천하고 공허하다는 증거다.
그것은 내면의 공허를 외면의 요란으로 감추려는 열등감이다.
이런 시끄러운 열등이 우월이라고 광고하는 세상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은 영웅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오랜 수련 중에 있는 구도자는 자신이 가야할 곳을 안다.
그곳을 향해 그 누구의 눈치로 보지 않고 정진한다. 그는 마치 졸졸 흘러가는 개울물과 같다. 개울물에게 방해란 없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갈수 있고 가야만 하는 여정의 일부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여덟 번째 글 <산에 심겨진 나무에 관하여>에서 한 나무에 관해 말한다. 차라투스트라가 한 저녁에 ‘얼룩 황소’라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는 한 젊은이가 계곡 아래를 걱정스럽게 응시하며, 한 나무에 기대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이 젊은 이는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의 터전, 저 계곡 밑에 위치한 마을을 응시한다. 그가 기댄 나무는 튼튼하고 깊이 뿌리 박혀 아무리 손으로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무는 오랫동안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켰다. 나무가 저 우주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그 나무의 뿌리는 정확하게 지구의 중심으로, 아래로, 어둠으로, 심연으로 내려간다. 그 보이지 않는 근원이 나무의 품격을 만든 것이다. 태곳적이 바람에 의해 씨앗이 날라 왔다.
그 이름 모를 야산의 모서리에 안착하였고, 바람, 공기, 안개, 비, 햇빛을 통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잎과 가지를 내고 비바람과 눈보라를 통해 이렇게 우뚝 선 나무가 되었다.
구도자는 그런 나무와 같다.
나무의 특징은 단순함이다. 자신의 뿌리로부터 중력을 거슬려 올린 생명의 환희를 간직한고 항상 자신을 있는 그대로 그러낸다. 단순함은 궁극의 사치이며 최선의 아름다움이다.
세상에는 자연이 있고 사물이 있다. 자연의 원칙은 무위無爲이며 인간이 만은 사물의 원칙은 인위人爲다.
저 전나무의 뿌리와 같이 볼 수는 없지만, 그 웅장하게 하늘 높이 가지를 펼친 나무의 기반인 격格이다.
격은 그 대상이 그 대상답게 하는 품격이다. 사서삼경 중에 하나인 <대학>은 큰 학문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추구해야할 것을 ‘격물格物’이라고 말한다.
‘격물’을 통해서만 ‘궁극적인 배움에 도달하수 있다. '致知’고 말한다. 글을 통한 배움을 훌륭하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격물’이 선행되어야한다.
생물들을 씨앗에서 출발한다. 그 씨앗이 점점 불어나 나무가 되고, 꽃이 되며, 새가 되고 물고기가 된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후에 등장하는 겉의 기반이 되는 속을 ‘본本’이라고 말한다.
본은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생명력을 지닌 어떤 것이다. 이 어떤 것을 우리는 쉽게 씨앗이라고 부른다. 씨앗이 장소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통해 겉이 드러나게 된다.
그 드러난 것이 바로 ‘말末’이라고 말한다. 인간들이 먹고 살기 위해 벌린 일인 ‘사’事는 처음이 있고 끝이 있다.
우리는 그 처음, 중간, 그리고 마지막을 볼 수 있다.
일이 온전히 성사되기 위해서는 시종일관始終一貫 한 원칙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진행되어야한다.
‘격’은 저 보란 듯이 위엄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들 드러내지 않고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어우러져 기꺼이 숲을 이루려는 겸손도 지니고 있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격’을 자신의 언행을 조종하고 발휘시키는 원칙이라고 말한다. 그는 <명상록> 제 5권 11단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영혼을 몰입하는가?’
당신은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당신에게 물으십시오!
당신은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원칙’이라는 부분에 당신이 얼마나 부합하는지, 스스로를 완벽하게 점검하십시오.
나는 누구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나는 어린아이의 영혼, 젊은이의 영혼.. 독재자의 영혼, 시인의 영혼, 혹은 야생동물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우렐리우스는 구도자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원칙, 그 근본을 그리스어로 ‘헤게모니코스ἡγεμονικός’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한다.
<대학>은 책이나 스승을 통한 지식이 사물의 이치와 격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의 관찰과 탐구를 기다리는 ‘격물格物’이 궁극의 지식과 지혜를 가져다 준다고 말한다.
자연의 섭리, 즉 그 격格을 살펴볼 기회다.
살다보면, 가끔 아니 드물게 격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
내면에서 우러나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카리스마로, 주위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인다.
이 매력은, 흉내와 시기가 남무 하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여 오롯이 정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자신만의 길을 내서, 주위사람들을 그 길로 자연스럽게 인도한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매력을 스스로 찾도록 친절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부탁한다.
그는 자신의 본모습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언제나 편안하고 감동스럽다.
무엇을 억지로 드려내려고 치장治粧하지 않는다. 그런 요란한 치장은 그 대상이 흔하고 천하고 공허하다는 증거다.
그것은 내면의 공허를 외면의 요란으로 감추려는 열등감이다.
이런 시끄러운 열등이 우월이라고 광고하는 세상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은 영웅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오랜 수련 중에 있는 구도자는 자신이 가야할 곳을 안다.
그곳을 향해 그 누구의 눈치로 보지 않고 정진한다. 그는 마치 졸졸 흘러가는 개울물과 같다. 개울물에게 방해란 없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갈수 있고 가야만 하는 여정의 일부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여덟 번째 글 <산에 심겨진 나무에 관하여>에서 한 나무에 관해 말한다. 차라투스트라가 한 저녁에 ‘얼룩 황소’라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는 한 젊은이가 계곡 아래를 걱정스럽게 응시하며, 한 나무에 기대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이 젊은 이는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의 터전, 저 계곡 밑에 위치한 마을을 응시한다. 그가 기댄 나무는 튼튼하고 깊이 뿌리 박혀 아무리 손으로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무는 오랫동안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켰다. 나무가 저 우주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그 나무의 뿌리는 정확하게 지구의 중심으로, 아래로, 어둠으로, 심연으로 내려간다. 그 보이지 않는 근원이 나무의 품격을 만든 것이다. 태곳적이 바람에 의해 씨앗이 날라 왔다.
그 이름 모를 야산의 모서리에 안착하였고, 바람, 공기, 안개, 비, 햇빛을 통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잎과 가지를 내고 비바람과 눈보라를 통해 이렇게 우뚝 선 나무가 되었다.
구도자는 그런 나무와 같다.
나무의 특징은 단순함이다. 자신의 뿌리로부터 중력을 거슬려 올린 생명의 환희를 간직한고 항상 자신을 있는 그대로 그러낸다. 단순함은 궁극의 사치이며 최선의 아름다움이다.
세상에는 자연이 있고 사물이 있다. 자연의 원칙은 무위無爲이며 인간이 만은 사물의 원칙은 인위人爲다.
저 전나무의 뿌리와 같이 볼 수는 없지만, 그 웅장하게 하늘 높이 가지를 펼친 나무의 기반인 격格이다.
격은 그 대상이 그 대상답게 하는 품격이다. 사서삼경 중에 하나인 <대학>은 큰 학문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추구해야할 것을 ‘격물格物’이라고 말한다.
‘격물’을 통해서만 ‘궁극적인 배움에 도달하수 있다. '致知’고 말한다. 글을 통한 배움을 훌륭하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격물’이 선행되어야한다.
생물들을 씨앗에서 출발한다. 그 씨앗이 점점 불어나 나무가 되고, 꽃이 되며, 새가 되고 물고기가 된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후에 등장하는 겉의 기반이 되는 속을 ‘본本’이라고 말한다.
본은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생명력을 지닌 어떤 것이다. 이 어떤 것을 우리는 쉽게 씨앗이라고 부른다. 씨앗이 장소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통해 겉이 드러나게 된다.
그 드러난 것이 바로 ‘말末’이라고 말한다. 인간들이 먹고 살기 위해 벌린 일인 ‘사’事는 처음이 있고 끝이 있다.
우리는 그 처음, 중간, 그리고 마지막을 볼 수 있다.
일이 온전히 성사되기 위해서는 시종일관始終一貫 한 원칙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진행되어야한다.
‘격’은 저 보란 듯이 위엄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들 드러내지 않고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어우러져 기꺼이 숲을 이루려는 겸손도 지니고 있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격’을 자신의 언행을 조종하고 발휘시키는 원칙이라고 말한다. 그는 <명상록> 제 5권 11단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영혼을 몰입하는가?’
당신은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당신에게 물으십시오!
당신은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원칙’이라는 부분에 당신이 얼마나 부합하는지, 스스로를 완벽하게 점검하십시오.
나는 누구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나는 어린아이의 영혼, 젊은이의 영혼.. 독재자의 영혼, 시인의 영혼, 혹은 야생동물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우렐리우스는 구도자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원칙, 그 근본을 그리스어로 ‘헤게모니코스ἡγεμονικός’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한다.
<대학>은 책이나 스승을 통한 지식이 사물의 이치와 격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의 관찰과 탐구를 기다리는 ‘격물格物’이 궁극의 지식과 지혜를 가져다 준다고 말한다.
자연의 섭리, 즉 그 격格을 살펴볼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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