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충만이 있을 뿐
.
이것은 오래 쌓이면 '밀침'과 '끌림'의 토대다.
따라서 情(뜻 정)의 기본 요소가 됩니다.
여기에는 외적인 감지와 내적인 감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외적인 감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외부적이라 '느껴지는'것도 역시 내적인 '느낌'인 감지로
귀결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내적인
'느낌의 세계 일 뿐'이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거기에는 '세계는 마야(환영)다'라는 선언이 가슴에 와닿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세계가 환영이다'라는 것은 사실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감각적 자극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고 어떤 사물을 만져본다고 해봅시다.
그 촉감으로 보아 연필이라고 여겼는데 눈을 떠보니 유리박대기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유리막대가 '사실'이고, 내가 '경험'한 것은 사실이 아닌
'느낌'이었구나 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듯
손으로 '만진 것'이 일종의 느낌에 불과한 '촉감'이라면.....
소리는 어떻습니까 ?
소리 역시 우리 '안'에서 '느껴지는'하나의 감각일 뿐입니다.
저 밖의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지요.
나의 귀 안에서 들어와야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청각'아라고 하지요.
후각은 어떻습니꺼 ?
냄새 역시 코 안으로 들어와야만 '느껴집니다'.
즉 '느낌'이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맛은 어떨까요 ?
맛 역시 혀에 '닿아야'만 '느껴지는' 느낌일 뿐입니다.
결코 사물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감각의 내적인 느낌이라면 視覺이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요 ?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
'시각적 느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칸트는 우리가 物自體에 가 닿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감지란 바로 이렇게 직접 닿을 수 없는 물자체를,
우리는 감각으로 '느껴' 마음에 남긴 흔적을 말합니다.
감지들간의 미묘한 끌림이나 밀침이 오랜 패턴으로 쌓인 것
情이란
集積된 것이며, 고통과 즐거움의 원인입니다.
다분히 무의식적입니다.
무언가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면(欲),
그 전에 움직일 '무엇'이 미리 존재해야 합니다.
감정이란 어딘가로 향하는 에너지 분출입니다.
그것이 분노이든 기쁨이든 침잠하는 슬픔이든
어떤 방향으로 우리의 내적인 에너지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때 움직일 무엇으로 이미 '쌓있는 것'이 情(뜻 정)입니다
... 아주 어린 아이 때는 끌리고(快) 밀치(不快)는 情에서부터 커서는 좋고(好) 싫은
(惡)느낌인 情이 쌓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가볍게 흐르는 우울이나 짜증, 기분 좋음, 덤덤함 등에 싸여 있습니다.
그 미묘한 흔들림은 이상하게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