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識/관성...필사

경험의 세계

수승화강지촌 2022. 9. 16.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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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感情) .... 신념과 부딪치는 상황

정서(情緖) ....정이 풀려져 나옴, 일상의 분위기

()....감지들 간의 끌림과 밀침

감지(感知).... 경험의 흔적들

 

우리가 경험하는 이 世界

 

無意識的으로 쌓인 것들이 지배하는

 

慣性世界입니다.

 

불교에서는

 

無名의 바람이 만들어낸 고()의 세계라고 합니다.

 

불교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 무명의 바람, 즉 무의식적 쌓임()이고, 그 소멸의 이르는

 

길이 입니다.

 

이렇게 하여 불교의 四聖諦인 고집멸도가 설해진 것입니다.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

 

감지들과 동일 시되는 순간을 알아챌 수 있으며,

 

그러면 감지에 저절로 쏟아부어지는

 

생명 에너지가 차단됨으로 해서

 

동일시가 끊어지고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detail ...>>> 먼저

 

 

'감지들과의 동일시'

 

'그것을 알아챔'

 

'저절로 쏟아부어지는 생명에너지'

 

'에너지 차단에 의한 동일 시 끊기' 등의 문구들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해보겠습니다.

 

 

특히 感知이 바로 에 해당합니다.

 

경험의 1 차적 흔적인 감지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일어나는

 

미묘한 밀고 당기기의 패턴이 쌓인 것이

 

無意識的이고,

 

 

을 실마리로 해서 풀어져 나와 일상의 미묘한 무드를

 

조성하는 것이 情緖이며,

 

情緖기 증폭된 것이 感情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발현되는 근저에는

 

'나와 대상'의 분열이 있고 그 분열된 한 부분에 '믿음'의 에너지가

 

들러붙는다는 현상이 있습니.

''가 무의식적으로 고집하고 있는 마음속의 '이래야 한다'

 

신념에 저절로 쏟아부어지는 생명에너지가 바로 '믿음'이며,

 

그것은

 

강력하게 ''를 끌고 다닙니다.

 

 

그 강력한 힘의 핵심인

 

'믿음'을 느낄 줄 알게 되면 즉시 동일시가 끊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동력원인 '믿음'이라는 에너지의 차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을 하나의 '느낌'으로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는 점입니다.

 

우리는 과연 信念 '믿는 생각'에서

 

생각과 믿음을 분리시키고

 

그중 하나인 '믿음' 자체를 느낄 수 있을까요 ?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구별되는 모든 것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분별이 가능하고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생략 >>>

 

우리의 모든 의식작용에서,

 

以前의 움직임이 흔적을 남겨 일종의 내적인 기준이 되고,

 

이후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 약하면 痕跡(흔적)이라 하고,

 

조금 강하면 패턴(Pattern)으로 작용하며,

 

아주 강하면 틀()로 작용합니다.

 

 

그것이 '자아'라 이름 붙여진 것의 실체입니다.

 

이 자아가 확대된 것이 집합적인 '믿는 생각'으로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집단의식'이라 할 수 있는 사회는 인간의 '믿는 생각'들로 이루어집니다.

 

 

즉 그 믿는 생각이 무엇이냐에 따라 양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 생각에는 개인과 사회에 고착된 것이 있습니다.

 

 

생략>>>

 

~~~ 믿는 생각은 고착된 것 같지만 어떤 통찰이나 거대한 압력, 흐름에

 

의해 순간적으로도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신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는 생각의 양상을 잘 살펴 보십시오.

 

특히 거기에 붙어있는 '믿음'이라는 에너지를 상세히 느껴보십시오

 

그것이 감정을 넘어 그것을 아름답게

 

사용하기 위한 제 1단계 필수 과정입니다.

 

믿는 생각에서 한발 더 깊이 들어가면,

 

 

감정의 가장 기저에는 '나와 대상의 분열'

 

그러므로 잠이나, 몰입, 삼매 등의 과정 즉 "분별없음"에서

 

아침에 깨어난 상태나 여러 대상을 의식하는 상태인 "분열 있음"

 

으로 나오는 순간을 알아 채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대상으로서의 ''과 주체인 ''

 

확연하게 존재하는 이 세계가, '마음의 일'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분열없음'에서 최초의 '분열있음'으로 나오려고 할 때는

 

분열의 강도가 약하기에 그것이 '마음의 일이다'라고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파악된 것을 확연하게 분열된 '세계와 나'에도 적용해,

 

이것 역시 '마음의 일'임임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마음의 내적인 분열임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통찰이 감정을 넘어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가장 적절히 사용하며 살 토대가 되어줍니다.

감정은

 

역동적인 에너지의 발현이다.

 

 

생명유지를 위한 공포감이나 음식에 대한 쾌감처럼 본능적 충동이

 

아니라면 감정은 대부분 생각과 믿음이 만들어 냅니다.

 

 

그것들이 현재 일어난 상활과 부딪혀 일어나는 것. ... !!

 

 

感情 = 생각() X 믿음() X 상황

 

Contingency Theory - 狀況理論

 

 

여기서 생각은

 

일종의 방향타 역할을 하고, '믿음'은 에너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에너지는 자동적 주의 집중을 일으켜 그 생각에 빠지게

 

하며, 일종의 信憑性인 무게감을 줍니다.

 

 

먼저 당신이 전혀 관심없는 일에 대해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 느껴보고, 다음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거나 굳건히 믿고 있는 문장을 떠올려 느껴보십시오.

 

이 두 문장의 느낌에는 분명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무게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에너지' 무게를 '느낄 줄' 알게 되면

 

그로부터 쉽게 벗어 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붙어있던 생각은 마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글을 배끼면서 떠오른...

 

1. '나와 대상'

 

2. '에너지 무게'

 

3. '생각의 믿음'

 

다만 중요한 것은 '믿음' 그 자체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나의 신념에서 생각을 제외한 '믿음 자체'를 느끼는 연습을 해보십시오.

 

그것은 일종의 에너지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을 느끼게 되면 이제 당신은 그것 밖에 있게 됩니다.

 

 

느낀다는 것 자체가 그것으로부터 떠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연필을 쥔 채로 살아왔으며,

 

전 생애동안 한 번도 이 연필을 놓아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분명 어떤 '느낌'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느낌'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느낌이 '없었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번만이라도 연필을 놓아본다면 비로소 늘 있어왔던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나와 대상으로 분열되는 순간 ''라는 느낌에 동일시되어

 

그것을 붙들고 있지만, 의식적이 된 이래로 늘 그래왔기에 ''라는 것을 하나의 느낌으로

 

'느낄 수 없는'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번만 거기서 빠져나와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되고,

 

드디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일부분

 

또는 '현상일 뿐' 임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모를 때'

 

생겨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아이들은 만물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요 중에 '모르는 야자가 아름다워요'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통속적이라

 

여겨질지 모르지만 이 말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가사를 쓴 시인은 직관적으로 '아름다음'으 진정한 의미를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일 때는 자연스럽게 '모르는 상태'이지만,

 

이제 4~50년 이상을 산 성인들은 '모르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에게서 관심과 사람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첫눙에 반해 사람을 사귀기 시작했다 해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 그가 '아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면

 

우리의 소위 '사랑'은 식어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상대를 '안다'고 판단한 것은 대부분 '그렇다고' '믿는 생각' 일뿐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다' 라는 신념이

 

그를 '뻔한 사람'으로 만들며,

 

그를 지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신비를 빼앗는 것은 바로

 

'그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나의 생각과 그것에

 

'붙어있는 마음()입니다.

 

생각을 떠올리지 않은 상태로 보면

 

그는 여전히 신비롭지만 이제 ''는 그를 '신비롭게'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가 너무 많은 것을 '알기'때문입니다.

 

당신이 많은 것을 '아는'사람이

 

되었다면....

 

 

이제 근본에서 멀어졌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는 우리에게

 

너무도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다'는 생각에 붙은 믿음은

 

'지루함'을 만들어내고

 

'삶의 신비'를 몰아내버렸습니다.

 

당신이 일상에서

 

'신비감'을 느끼게 되면 이제 더 이상 타인에게서 사랑을 받기 위해 애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랑을 '받을'필요를 못 느낍니다.

 

그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왜 일까요 ??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래서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만물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관심을 바로 '사랑'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이며, 스스로 만물에 대한 깊은 관심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사랑'속에 있기에

 

외부의 사랑을 애타게 갈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만물에 대한 관심을 즉시 사랑으로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화로운 관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은

 

평화로운 관심이고 그 본성이 실현될 때

 

넘치는 것이 사랑이며,

 

그 사랑이 드러날 때 느껴지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모든 것이'그것'

 

현현입니다.

 

바로 에서

 

모든 것을 그것으로 표현하는 이유입니다.

 

손가락 하나를 처든 것도

 

'그것'의 발현이요.

 

마른 똥막대기가 굴러다는 것도 그것의 현현이며,

 

세상 만물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그것의 현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에 걸처 느껴온 부족감은

 

근원적 통찰이 일어나면 뿌리째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애초부터 전혀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통찰을 통해 인생의 부족감이 해결되면 이제 드디어 오래된

 

慣性이 걸린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慣性은 모든 후천적 경험의 흔적으로 인해 작용합니다.

 

 

생각과 감정애 휘둘리며 살다가

 

그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일정기간 자유로움이 있지만

 

곧 일종의 금단현사이 일어납니다.

 

 

즉 나와 대상이라는 양극성의 격렬한 움직임 상태에 있다가, 분열이 약화되어 고요한 상태로

 

오게 되면 극도의 무료함, 지루함이 느껴집니다. 그것은활동에서 비활동으로 옮겨오는 데서

 

오는 일종의 禁斷現象과 같은 것입니다.

 

禁斷現象을 그대로 겪으며 지나가면 다시 고요함이 평상이 되는 삶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 이후에 서서히 약간의 움직임을 통해 중용의 도를 찾는 것, 이때부터 중용의 도가 필요하며

 

平常心가 되는 시기인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몸과 마음은 평상적으로 움직이면서

 

살아가게 되며, 가장 효율적으로 애너지 낭비 없이, 받은 만큼 자연에 되돌려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보통 사람의 일상이라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만큼 되돌려주지 못하고 항상 스스로 안에서 생각과 감정의 마찰로 인한

 

낭비가 심하여 최고의 효율을 내지 못하는 삶입니다.

 

 

즉 자연으로부터 받은 만큼 되돌려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100을 받아서 30% 정도만 되돌려줄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자기'라는 틀 안에서

 

葛藤하고, 苦悶하는 데 다 써버리고 맘니다.

 

 

마치 인간이 만든 내연기관이 휘발류의 30%만 실제 동력으로 쓰고,

 

너머지는 엔진 내부의 마찰열 등으로 낭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자연으로부터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주는 것, 그것입니다.

감정으로부터의 自由

 

자기 내면의 믿음의 밀도를 가볍게 수정할 수 있다면,

 

그는 '믿음'을 넘어선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의 생각이나 감정에 들러붙은 에너지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이유'로 거기에 들러붙어 있지만

 

사실은 '아무런 이유없이' 믿음의 에너지를 하나의 생각에

 

====붙이고 떼어낼 수 있을 때

 

그는 진정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에너지가 들러붙은 그 전체 '프로세스'를 명확히

 

들여다보면 됩니다.

 

그 전체 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말은

 

이제 그가 더 이상내적 분열....

 

감정의 요소인 '생각'은 마음을 구성하는 청사진 ...!!

 

 

이것이 바로 '나와 대상'으로 나뉘어진 모습이다.

 

우리가 어떠한 생각에 사로 잡힐 때면

 

그 생각의 가장 중심되는 구조 속에는

 

'나와 대상'이 생겨나있고,

 

 

생각의 모든 초점은

 

'나를 강화시키고'

 

'나를 지키고'

 

'내가 상처받지 않는 것'에 가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찰하게 되면

 

그 과정 속 빠져 들지 않게 되며,

 

생각은 힘이 약해지고 주저앉게 됩니다.

 

 

물론 그 이전에 ''라는 것은 대상과 함께 나타나며,

 

상활에 따라 생겨나는 임시적인 '현상'임을 통찰한다면

 

아주 근본적으로 생각을 무력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적인 분열을 느낌을 통해 좀더 깊이 파고

 

들어가보면

 

매우 흥미로운 요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체감'이라는 것인데

 

''라는 현상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입니다.

 

이 주체감은 항상 '대상'이 있어야 느껴지는 것으로

 

동전의 양면가 같은

 

 

'주체'/ '대상'의 쌍둥이 느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느낌을 더 깊이 탐구해보면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경험하게 되는

 

'존재감'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존재감 깊숙히 들어가게 되면

 

거기 더 이상 '경험'이라 할 만한 것도,

 

경험자라 할 만한 것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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