闚(규) 엿보다,
闚知(규지) 엿보아 안다.
'규'라는 것은 하나의 틀 안에서 문을 조금 열고 엿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린세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닫힌 체계안에서
자기 기준의 좌표를 가지고 보고 있으며, 따라서 좁고 편협될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논리와 과학적 사고는 하나의 기준이나 가정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고가 딛고 서 있을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논리학의 꽃이라 할 유클리트 기하학은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그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선은 하나 밖에 없다'는 등과 같은 공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가정은 보요이와 로바체프스키에 의해 깨졌는데, 그들은 유클리트
기하학이 휘어지지 않은 공간을 무의식적으로 가정했음을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직선, 평면, 공간이 모두 휘어질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클리드가 공간은 휘어지지 않는다라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전제를 통해
사고한 것과 같이 자신도 모르는 하나의 틀 안에서 사물과 세상을 보는 것이 '闚'이다.
窺觀 ... 왜 좁은 틀 안에서 보게 되는 것일까?
... 그것은 그가 자신을 유지하는 데에 중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의 뜻은 자기유지를
위한 중심으로 향합니다. 이는 안과 밖으로 표현되는데 거시적으로 볼 때 안이 없는 이는
밖도 공허합니다. 모든 것은 안에서 시작해 밖을 향합니다. 안이 준비되지 읺으면 밖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몸 밖으로만 향할 때는 헛된 노력이기 쉽습니다/
직관은 왜 구심적일까요?
왜
구심점이 없는 이에게는 직관이 솟아나지 않을까요?
* 심층의 직관적인 지혜는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
자신의 뜻을 간직하려하지 말고,
그것을 펼쳐내도록 하면 闚觀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배웁니다. ... 이 글은 이원규님의 풍지관을 통해 배움의 "note"임을 밝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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