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識/관성...필사

내적,외적 분열

수승화강지촌 2022. 9. 16.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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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분열....

감정의 요소인 '생각'은 마음을 구성하는 청사진 ...!!

 바로 '나와 대상'으로 나뉘어진 모습이다.

 

우리가 어떠한 생각에 사로 잡힐 때면

그 생각의 가장 중심되는 구조 속에는

'나와 대상'이 생겨나있고,

 

 

생각의 모든 초점은

'나를 강화시키고'

'나를 지키고'

'내가 상처받지 않는 것'에 가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찰하게 되면

그 과정 속 빠져 들지 않게 되며,

생각은 힘이 약해지고 주저앉게 됩니다.

 

물론 그 이전에 ''라는 것은 대상과 함께 나타나며,

상활에 따라 생겨나는 임시적인 '현상'임을 통찰한다면

아주 근본적으로 생각을 무력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적인 분열을 느낌을 통해 좀더 깊이 파고

들어가보면

매우 흥미로운 요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체감'이라는 것인데

 

''라는 현상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입니다.

이 주체감은 항상 '대상'이 있어야 느껴지는 것으로

동전의 양면가 같은

'주체'/ '대상'의 쌍둥이 느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느낌을 더 깊이 탐구해보면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경험하게 되는

'존재감'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존재감 깊숙히 들어가게 되면

 

거기 더 이상 '경험'이라 할 만한 것도,

 

경험자라 할 만한 것도 없는

 

 

텅빈 충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오래 쌓이면 '밀침''끌림'의 토대다.

따라서 (뜻 정)의 기본 요소가 됩니다.

 

 

여기에는 외적인 감지와 내적인 감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외적인 감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외부적이라 '느껴지는'것도 역시 내적인 '느낌'인 감지로

귀결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내적인

'느낌의 세계 일 뿐'이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거기에는 '세계는 마야(환영)'라는 선언이 가슴에 와닿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세계가 환영이다'라는 것은 사실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감각적 자극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고 어떤 사물을 만져본다고 해봅시다.

그 촉감으로 보아 연필이라고 여겼는데 눈을 떠보니 유리박대기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유리막대가 '사실'이고, 내가 '경험'한 것은 사실이 아닌

'느낌'이었구나 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듯

손으로 '만진 것'이 일종의 느낌에 불과한 '촉감'이라면.....

 

​소리는 어떻습니까 ?

소리 역시 우리 ''에서 '느껴지는'하나의 감각일 뿐입니다.

 

 

저 밖의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지요.

 

나의 귀 안에서 들어와야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청각'아라고 하지요.

 

후각은 어떻습니꺼 ?

냄새 역시 코 안으로 들어와야만 '느껴집니다'.

 

'느낌'이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맛은 어떨까요 ?

맛 역시 혀에 '닿아야''느껴지는' 느낌일 뿐입니다.

결코 사물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감각의 내적인 느낌이라면 視覺이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요 ?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

'시각적 느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칸트는 우리가 物自體에 가 닿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감지란 바로 이렇게 직접 닿을 수 없는 물자체를,

우리는 감각으로 '느껴' 마음에 남긴 흔적을 말합니다.

감지들간의 미묘한 끌림이나 밀침이 오랜 패턴으로 쌓인 것

 

이란

集積된 것이며, 고통과 즐거움의 원인입니다.

다분히 무의식적입니다.

 

 

무언가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면(),

그 전에 움직일 '무엇'이 미리 존해야 합니다.

 

감정이란 어딘가로 향하는 에너지 분출입니다.

그것이 분노이든 기쁨이든 침잠하는 슬픔이든

어떤 방향으로 우리의 내적인 에너지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때 움직일 무엇으로 이미 '쌓있는 것'(뜻 정)입니다

 

... 아주 어린 아이 때는 끌리고() 밀치(不快)에서부터 커서는 좋고() 싫은

()느낌인 이 쌓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가볍게 흐르는 우울이나 짜증, 기분 좋음, 덤덤함 등에 싸여 있습니다.

 미묘한 흔들림은 이상하게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지성적 통찰을 통해

머리의 의문은 완전히 사하지지만 이 정서적인 허무감이나 불캐감은 오래도록

가지기 않습니다.

 

 

왜일까요 ?

왜 이 느낌은 눈을 뜨면서부터 생겨나 있는 것일까요 ?

 

그것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나는 그것이 무의식에 쌓인 어떤 의 작용임을 알아챘습니다.

잠은 무의식으로 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무의식에서 빠져 나오는 과정입니다.

느껴진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무의식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어떤 쌓여있는 정이 작용을 하는 곳입니다.

마치 바다의 밑바닥이 은근한 출렁임으로 늘 흔들리고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표면의 끊임없는 파도가 일시적인 현상일 뿐

 

나의 본성이 아님을 알아채자

 

그 파도는 잠잠해졌지만, 심해에서 은근하게 흔들리는 거대한 무의식적

 

흐름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어떤 것도 ''자체를 흔들 수 없다느 것을 통찰했기에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느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 은근한 흔들림은 인류 전체가 공통으로 경험하는

 

집합적인 관성이기도 합니다. / 慣性입니다.

 

* 생략

 

... '자신이 한 생각'이라는 느낌이 들면 그는 그것을 '자기'라고 믿는다.

 

이렇게 해서 허구적인 '자아' 또는 ''라는 것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무의식적 축척물인 것입니다.

 

이것을 '감지'라고 불렀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우리의 행동패턴 근저에 놓여 있는 감지이고 이 감지들

 

간의 끌림과 밍침이 바로 이며 감정의 기저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쌓인 것()이 실마리(- 실마리)가 되어

 

일상에서 풀어져나오면 情緖가 되고 그것이 증폭되어 '느껴지면()'

 

이제 드디어 感情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이 감정욕구의 발현을위한 토대인 은 대부분 無意識的,

 

유전적(形態形成)쌓임입니다.

 

 

이것은 이유없는 퇴적물인 감지들 간의 밀고 당기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퇴적물을 기반으로 모든 喜怒哀樂이 탄생합니다.

늘상 느끼는

 

일상의 미묘한 분위기

 

대부분 의식적이다.

 

쌓여진 무의식적 이 실마리가 되어 미묘한 우울이나 짜증스런 기분,

 

가벼운 흥분이나 미약한 상실감 등

 

우리 일상의 mooood를 조성합니다.

 

 

이것이 情緖입니다.

 

정서라 불리는 이 mood는 일상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어는 특정한

 

감정으로 증폭되게 합니다.

 

 

무의식적 - 에 의해 한사람의 일상의 MOOD가 결정되는 ...

 

 

이것은

 

물리적인 것에 영향 받는 차원에서,

 

점차 물리적인 것을 상상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정신적인 차원으로 분화 발전합니다.

情緖가 증폭되어

 

무의식적인 을 의식적으로

 

강하게 '느끼게 되는'

 

드디어 하나의 방향으로 증폭된 에너지가 발현됩니다.

 

그것은 '주로 나를 지키는'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감정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형성되는 오래된 지혜이지만,

 

베이기 쉬운 날카로운 칼날과 같습니다.

 

또한 강력한 에너지의 움직입니다

 

 

본능적 감정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감정이 생각과 '믿음'이라는

 

에너지의 결합의 산물입니다.

 

 

믿음은 생명력이 의식적으로 표현된 가장 투명한 모습인

 

主意가 강렬히 뭉쳐있는 형태입니다. 또 감정은 물질적 표현인 호르몬 분비에

 

연관되고, 자동화의 연관되어 있으며 대부분 그 뿌리가 무의식적입니다.

주의 에너지의

 

강열한 뭉침

 

생각에 붙어 있던 이것이 풀어져 흩어지면

 

생각이 힘을 잃습니다.

 

 

믿음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념- Belief과는 다르며 信念 중 내용()을 뺀 순수한 의식적

 

에너지만을 말합니다. ......!!

 

그것은 우리가 自動的 注意라고 부르는 특정 마음상태의 뭉쳐진 농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강한 믿음()이 붙어 있는 생각(), 믿음이 없는 생각에 비해

 

'무게감''신빙성'을 지니며, '느껴보면' 의식적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느낄 줄 알게 되면 이제 그것을 자연스레 내려 놓을 수 있게 되며,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믿는 생각들로부터 영향받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대부분 이 '믿는 생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느끼게 되면,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이미 거기서 떨어져 나온 곳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념의 핵심인 믿음을 '' 수 있는 자리로 ''의 내면의

 

 

 

중심이 옮겨가는 것입니다.

 

생각은 일종의 청사진 .....!!!

 

거기에는 아무런 힘도 없다.

 

 

청사진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주의'라는 의식적 생명에너지이며

 

注意가 하나의 생각에 모이고 뭉치면 드디어

 

행동을 일으키는 강력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은 에너지가 나아가는 방향을 일러주는

 

아주 중요하지만 또한 아주 힘이 없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챌 때,

 

 

그것을 '도구'로 사용할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나의 구성 요소

 

관성을 넘어가기 - 越因 지음

 

'나와 대상'이 동시에 발생할 때

 

그 중 ''라는 느낌을 일으키는 구성 성분의 하나가 '주체감'입니다.

 

또 하나의 성분인 '내용'이 청사진이라면,

 

'주체감'은 어떤 '주인'의 느낌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注意가 많이 모이고 쌓여 흘러갈 '주의의 원천(source)'

 

역할을 하는데,

 

그래서 '주체'는 내외적으로 주의의 시작점이 되고,

 

'대상'은 주의의 도착점이 됩니다.

 

 

예를 들어 저 밖에 있는 나무를 보면

 

이 몸에 있는 ''가 대상인 저 '나무'를 본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때 주의는 이 몸 쪽에서 저 나무 쪽으로 흐릅니다.

 

 

즉 이 몸이 주의의 시작점, 나무가 주의의 도착점이 되어

 

'나와 대상'을 이루게 됩니다.

 

 

또 내면을 살펴봐도

 

'누군가'가 있는 쪽으로 '주의'가 흐릅니다.

 

 

아 두 경우 모두

 

'이 쪽'은 주체로 느껴지고

 

'저 쪽'은 대상으로느껴지는데,

 

 

이는 '주의'가 시작하는 쪽이 주체로,

 

주의가 도착하는 쪽이 '대상'으로

 

느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험할 수 있는 최후의 것으로

 

주체감의 구성 성분

 

 

 

'주체감'에서 '/대상' 감이라는 느낌이 희미해지고 남는

 

최종적인 느낌이 존재감입니다.

 

 

"있음"이라고 불립니다.

 

즉 내면탐구의 과정에서

 

'주체감'을 탐구 대상으로 삼게 되면

 

탐구하려는 의도는,

 

'주체감'을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탐구하려는

 

의도적 '주의'와 탐구대상인 '주체감'이 모두 그 핵심에 있어서는

 

'주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찰 초기에는 둘이 서로 다르게 존재하고 있는 듯

 

여겨지나,

 

오래지 않아 그 둘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라지며

 

오직 하나 남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존재감입니다.

 

 

마음의 '세계'는 경계가 있는 세계인데,

 

존재감 속에서는 경계가 사라지니 마음의 모든 구분은

 

흔적 없이 증발해버리고 말게 됩니다.

世上은 그림자 이전 - 世界는 그림자의 세계

 

그림자의 세계 / 이것을 통찰하고 이루고 있는 관성을 다루게 되면

 

이제 관성을 넘어가게 됩니다.

 

 

세계란 마음이 나눠놓은 현상계를 말합니다.

 

여기서 세계와 세상을 구분합니다.

 

불이(不二)의 우주인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아무런 경계와 분할이 없지만,

 

마음에 그것이 비춰지면 이제 경게가 생기고 국경이 그려지며,

 

그 경계를 통해 서로 간에 만남과 헤어짐, 생로병사, 갈등과 행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보는 世界不二世上이 마음에 비춰진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식'한다고 할때는,

 

비로 그렇게 경계지어진 그림자 '세계'속에서

 

의식하여 울고 웃고 하는 것이며, 그래서 환상 속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나누어지지 않은 세상은

 

땅와 같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나누어 놓은 세계는 한국과 미국, 일본처럼 땅에다 금을 긋고

 

'이름'을 붙여놓은 지도와 같은 땅일 뿐이지요.

 

그러나 사실 땅에는 그 어떤 나라도 없습니다. 그저 땅일 뿐이지요.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땅인 世上

 

그 자체가 아닌,

 

人間()이 경계지어 놓은() 곳이 바로 세계인 것입니다.

 

世上 : 그림자 이전 ...!!!

 

 

세상은 아무런 분별이 없는 '하나'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는

 

질서와 평등, 조화인 우주 '그것'입니다.

 

 

위의 용어 설명에서 감정과 그 하부구조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感情은 내가 '믿는() 생각()' 과 그에 부딪치는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이 만나 일어납니다.

 

 

그리고 네가 믿는 생각은 '믿음'이라는 에너지와

 

생각이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지며,

 

이때 '생각''''대상'으로 구성되며

 

그중 ''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 주체감과 경험의 흔적들로 이루어지고,

 

 

'주체감'은 투명한 '존재감'

 

나와 대상을 나누는 나/대상감에서

 

''의 느낌이 합하여 이루어집니다.

 

 

감정(感情) .... 신념과 부딪치는 상황

 

.

 

.

 

정서(情緖) ....정이 풀려져 나옴, 일상의 분위기

 

.

 

.

 

()....감지들 간의 끌림과 밀침

 

.

 

.

 

감지(感知).... 경험의 흔적들

우리가 경험하는 이 世界

 

無意識的으로 쌓인 것들이 지배하는

 

慣性世界입니다.

 

불교에서는

 

無名의 바람이 만들어낸 고()의 세계라고 합니다.

 

불교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 무명의 바람, 즉 무의식적 쌓임()이고, 그 소멸의 이르는

 

길이 입니다.

 

이렇게 하여 불교의 四聖諦인 고집멸도가 설해진 것입니다.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

 

감지들과 동일 시되는 순간을 알아챌 수 있으며,

 

그러면 감지에 저절로 쏟아부어지는

 

생명 에너지가 차단됨으로 해서

 

동일시가 끊어지고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detail ...>>> 먼저

 

 

'감지들과의 동일시'

 

'그것을 알아챔'

 

'저절로 쏟아부어지는 생명에너지'

 

'에너지 차단에 의한 동일 시 끊기' 등의 문구들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해보겠습니다.

 

 

특히 感知이 바로 에 해당합니다.

 

경험의 1 차적 흔적인 감지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일어나는

 

미묘한 밀고 당기기의 패턴이 쌓인 것이

 

無意識的이고,

 

 

을 실마리로 해서 풀어져 나와 일상의 미묘한 무드를

 

조성하는 것이 情緖이며,

 

情緖기 증폭된 것이 感情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발현되는 근저에는

 

'나와 대상'의 분열이 있고 그 분열된 한 부분에 '믿음'의 에너지가

 

들러붙는다는 현상이 있습니.

''가 무의식적으로 고집하고 있는 마음속의 '이래야 한다'

 

신념에 저절로 쏟아부어지는 생명에너지가 바로 '믿음'이며,

 

그것은

 

강력하게 ''를 끌고 다닙니다.

 

 

그 강력한 힘의 핵심인

 

'믿음'을 느낄 줄 알게 되면 즉시 동일시가 끊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동력원인 '믿음'이라는 에너지의 차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을 하나의 '느낌'으로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는 점입니다.

 

우리는 과연 信念 '믿는 생각'에서

 

생각과 믿음을 분리시키고

 

그중 하나인 '믿음' 자체를 느낄 수 있을까요 ?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구별되는 모든 것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분별이 가능하고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생략 >>>

 

우리의 모든 의식작용에서,

 

以前의 움직임이 흔적을 남겨 일종의 내적인 기준이 되고,

 

이후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 약하면 痕跡(흔적)이라 하고,

 

조금 강하면 패턴(Pattern)으로 작용하며,

 

아주 강하면 틀()로 작용합니다.

 

 

그것이 '자아'라 이름 붙여진 것의 실체입니다.

 

이 자아가 확대된 것이 집합적인 '믿는 생각'으로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집단의식'이라 할 수 있는 사회는 인간의 '믿는 생각'들로 이루어집니다.

 

 

즉 그 믿는 생각이 무엇이냐에 따라 양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 생각에는 개인과 사회에 고착된 것이 있습니다.

 

 

생략>>>

 

~~~ 믿는 생각은 고착된 것 같지만 어떤 통찰이나 거대한 압력, 흐름에

 

의해 순간적으로도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신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는 생각의 양상을 잘 살펴 보십시오.

 

특히 거기에 붙어있는 '믿음'이라는 에너지를 상세히 느껴보십시오

 

그것이 감정을 넘어 그것을 아름답게

 

사용하기 위한 제 1단계 필수 과정입니다.

 

믿는 생각에서 한발 더 깊이 들어가면,

 

 

감정의 가장 기저에는 '나와 대상의 분열'

 

그러므로 잠이나, 몰입, 삼매 등의 과정 즉 "분별없음"에서

 

아침에 깨어난 상태나 여러 대상을 의식하는 상태인 "분열 있음"

 

으로 나오는 순간을 알아 채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대상으로서의 ''과 주체인 ''

 

확연하게 존재하는 이 세계가, '마음의 일'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분열없음'에서 최초의 '분열있음'으로 나오려고 할 때는

 

분열의 강도가 약하기에 그것이 '마음의 일이다'라고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파악된 것을 확연하게 분열된 '세계와 나'에도 적용해,

 

이것 역시 '마음의 일'임임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마음의 내적인 분열임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통찰이 감정을 넘어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가장 적절히 사용하며 살 토대가 되어줍니다.

감정은

 

역동적인 에너지의 발현이다.

 

 

생명유지를 위한 공포감이나 음식에 대한 쾌감처럼 본능적 충동이

 

아니라면 감정은 대부분 생각과 믿음이 만들어 냅니다.

 

 

그것들이 현재 일어난 상활과 부딪혀 일어나는 것. ... !!

 

 

感情 = 생각() X 믿음() X 상황

 

Contingency Theory - 狀況理論

 

 

여기서 생각은

 

일종의 방향타 역할을 하고, '믿음'은 에너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에너지는 자동적 주의 집중을 일으켜 그 생각에 빠지게

 

하며, 일종의 信憑性인 무게감을 줍니다.

 

 

먼저 당신이 전혀 관심없는 일에 대해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 느껴보고, 다음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거나 굳건히 믿고 있는 문장을 떠올려 느껴보십시오.

 

이 두 문장의 느낌에는 분명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무게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에너지' 무게를 '느낄 줄' 알게 되면

 

그로부터 쉽게 벗어 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붙어있던 생각은 마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글을 배끼면서 떠오른...

 

1. '나와 대상'

 

2. '에너지 무게'

 

3. '생각의 믿음'

 

다만 중요한 것은 '믿음' 그 자체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나의 신념에서 생각을 제외한 '믿음 자체'를 느끼는 연습을 해보십시오.

 

그것은 일종의 에너지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을 느끼게 되면 이제 당신은 그것 밖에 있게 됩니다.

 

 

느낀다는 것 자체가 그것으로부터 떠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연필을 쥔 채로 살아왔으며,

 

전 생애동안 한 번도 이 연필을 놓아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분명 어떤 '느낌'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느낌'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느낌이 '없었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번만이라도 연필을 놓아본다면 비로소 늘 있어왔던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나와 대상으로 분열되는 순간 ''라는 느낌에 동일시되어

 

그것을 붙들고 있지만, 의식적이 된 이래로 늘 그래왔기에 ''라는 것을 하나의 느낌으로

 

'느낄 수 없는'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번만 거기서 빠져나와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되고,

 

드디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일부분

 

또는 '현상일 뿐' 임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모를 때'

 

생겨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아이들은 만물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요 중에 '모르는 야자가 아름다워요'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통속적이라

 

여겨질지 모르지만 이 말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가사를 쓴 시인은 직관적으로 '아름다음'으 진정한 의미를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일 때는 자연스럽게 '모르는 상태'이지만,

 

이제 4~50년 이상을 산 성인들은 '모르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에게서 관심과 사람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첫눙에 반해 사람을 사귀기 시작했다 해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 그가 '아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면

 

우리의 소위 '사랑'은 식어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상대를 '안다'고 판단한 것은 대부분 '그렇다고' '믿는 생각' 일뿐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다' 라는 신념이

 

그를 '뻔한 사람'으로 만들며,

 

그를 지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신비를 빼앗는 것은 바로

 

'그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나의 생각과 그것에

 

'붙어있는 마음()입니다.

 

생각을 떠올리지 않은 상태로 보면

 

그는 여전히 신비롭지만 이제 ''는 그를 '신비롭게'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가 너무 많은 것을 '알기'때문입니다.

 

당신이 많은 것을 '아는'사람이

 

되었다면....

 

 

이제 근본에서 멀어졌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는 우리에게

 

너무도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다'는 생각에 붙은 믿음은

 

'지루함'을 만들어내고

 

'삶의 신비'를 몰아내버렸습니다.

 

당신이 일상에서

 

'신비감'을 느끼게 되면 이제 더 이상 타인에게서 사랑을 받기 위해 애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랑을 '받을'필요를 못 느낍니다.

 

그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왜 일까요 ??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래서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만물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관심을 바로 '사랑'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이며, 스스로 만물에 대한 깊은 관심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사랑'속에 있기에

 

외부의 사랑을 애타게 갈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만물에 대한 관심을 즉시 사랑으로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화로운 관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은

 

평화로운 관심이고 그 본성이 실현될 때

 

넘치는 것이 사랑이며,

 

그 사랑이 드러날 때 느껴지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모든 것이'그것'

 

현현입니다.

 

바로 에서

 

모든 것을 그것으로 표현하는 이유입니다.

 

손가락 하나를 처든 것도

 

'그것'의 발현이요.

 

마른 똥막대기가 굴러다는 것도 그것의 현현이며,

 

세상 만물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그것의 현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에 걸처 느껴온 부족감은

 

근원적 통찰이 일어나면 뿌리째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애초부터 전혀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통찰을 통해 인생의 부족감이 해결되면 이제 드디어 오래된

 

慣性이 걸린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慣性은 모든 후천적 경험의 흔적으로 인해 작용합니다.

 

 

생각과 감정애 휘둘리며 살다가

 

그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일정기간 자유로움이 있지만

 

곧 일종의 금단현사이 일어납니다.

 

 

즉 나와 대상이라는 양극성의 격렬한 움직임 상태에 있다가, 분열이 약화되어 고요한 상태로

 

오게 되면 극도의 무료함, 지루함이 느껴집니다. 그것은활동에서 비활동으로 옮겨오는 데서

 

오는 일종의 禁斷現象과 같은 것입니다.

 

禁斷現象을 그대로 겪으며 지나가면 다시 고요함이 평상이 되는 삶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 이후에 서서히 약간의 움직임을 통해 중용의 도를 찾는 것, 이때부터 중용의 도가 필요하며

 

平常心가 되는 시기인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몸과 마음은 평상적으로 움직이면서

 

살아가게 되며, 가장 효율적으로 애너지 낭비 없이, 받은 만큼 자연에 되돌려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보통 사람의 일상이라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만큼 되돌려주지 못하고 항상 스스로 안에서 생각과 감정의 마찰로 인한

 

낭비가 심하여 최고의 효율을 내지 못하는 삶입니다.

 

 

즉 자연으로부터 받은 만큼 되돌려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100을 받아서 30% 정도만 되돌려줄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자기'라는 틀 안에서

 

葛藤하고, 苦悶하는 데 다 써버리고 맘니다.

 

 

마치 인간이 만든 내연기관이 휘발류의 30%만 실제 동력으로 쓰고,

 

너머지는 엔진 내부의 마찰열 등으로 낭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자연으로부터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주는 것, 그것입니다.

감정으로부터의 自由

 

자기 내면의 믿음의 밀도를 가볍게 수정할 수 있다면,

 

그는 '믿음'을 넘어선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의 생각이나 감정에 들러붙은 에너지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이유'로 거기에 들러붙어 있지만

 

사실은 '아무런 이유없이' 믿음의 에너지를 하나의 생각에

 

====붙이고 떼어낼 수 있을 때

 

그는 진정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에너지가 들러붙은 그 전체 '프로세스'를 명확히

 

들여다보면 됩니다.

 

그 전체 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말은

 

이제 그가 더 이상 그 '프로세스의 일부'가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內的分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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